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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병사가 떠준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쪽으로 얼굴을 들이 밀었습니다. 청명한 하늘 빛으로 인해 얼핏 자신의 얼굴이 물 위로 스쳤습니다. 에서는 물을 떠다 준 부하에게 빨리 가서 자신의 청동 방패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허겁지겁 가져온 청동 방패를 거울삼아 들여다 보았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은 온통 수염과 털로 뒤덮여 있고, 세월의 골을 짐작케 하는 주름과 거친 광야에서 얻은 상처자국으로 흉터투성이었습니다.

그렇게 늙고 변모한 모습 속에서 에서는 애써 어릴 적의 모습을 찾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아니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가 정말로 찾은 얼굴은 자신이 아니라 쌍둥이 동생 야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광야의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하였습니다. 20년이라는 세월 탓일까? 그는 방패를 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방패는 돌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참모들과 병사들은 순간 긴장한 눈빛을 보였다.

에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병사들이 모여있는 진영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을 때, 한 병사가 물과 팥죽을 가져 왔다. 팥죽을 보자 20여년 전 그 일이 불쑥 기억을 헤집고 솟아 나왔다. 그때 야곱은 팥죽 한 그릇을 주면서 자기에게 장자권을 팔라고 했고 에서는 반 농담으로 그러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약조나 법적인 강제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형의 위치와 축복권을 노렸던 동생 야곱의 계책이었습니다. 에서는 그 기억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실언도 후회스러웠지만, 동생의 교활함을 여실히 입증하는 상징적인 사건이기에 에서는 팥죽만 보면 그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그는 20년 동안 오직 동생에 대한 복수심과 축복권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칼을 갈아왔다. 야곱만 없어져 준다면 결국 장자는 자기밖에 없지 않겠는가?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이제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야곱이 그의 소유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에서는 에돔 들에 진을 치고 야곱과의 일전을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야곱과 얽힌 사연들로 겹쳐지면서 에서의 증오심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 근처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식솔과 재산을 가진 어엿한 족장으로 발돋움한 야곱의 얼굴도 이제 대장부로서의 위엄과 파란만장한 경륜을 짐작케 하는 성숙한 분위기가 엿보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면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함께 강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라헬이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20년 전의 일이오. 내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간지 만 20년이 지났소. 그때도 저는 형 에서를 피해 야반도주를 했었는데, 외삼촌 라반, 당신의 부친 집에서 나올 때도 역시 도망쳐 나오지 않았소? 내 인생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소."

라헬은 아직도 남편의 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라헬의 부친 라반이 종들이 이끌고 길르앗산까지 쫓아 왔었습니다. 라반은 잃어버린 신상 드라빔을 찾기 위해서였다. 라헬이 훔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야곱은 라반이 수색 끝에도 찾아내지 못하자 역정을 내며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을 비난하였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부를 얻긴 하였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으면 결코 얻을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라반이 야곱의 품값을 열 번도 넘게 변경하여 조금이라도 자기 재산이 축나지 않도록 애를 썼기 때문에 약아빠진 야곱조차도 장인의 수없는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에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하지만 드라빔 분실 사건은 오히려 서로 화해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고, 장인이 화평하게 되돌아 갔던 일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습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자기가 훔쳤다는 것을 남편에게 차마 이야기할 수 없어서 때를 보아 오던 차였다. 하지만 야곱의 얼굴에 가득한 수심을 보면서 라헬은 또다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드라빔 사건은 잘 해결되었잖아요. 아버님도 평안히 되돌아가셨고, 하란에서 도망쳐 나온 일도 이제 마음 쓸 일 없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모든 게 잘 되었지요."

야곱도 라헬의 위로가 죄책감 때문인 줄은 모르고, 오적 남편 걱정에 염려의 말을 해주는 것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어쨌든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할지라도 인생의 고독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은 야곱이 라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강물은 말없이 흐르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흐르는 듯하였습니다. 노을빛에 번들거리는 물결이 끊임없이 이어지듯이 야곱의 상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가 끊기도 또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야곱은 그 가운데 한 가지를 붙잡아 라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라헬에게 꼭 들려줘야 할 이유도 없고, 어쩌면 과거에 지나가는 말로 이미 들려준 적이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야곱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사실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정리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라헬,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에 가나안 땅에서 하란까지 2천리길을 홀로 걸었던 적이 있었소. 쌍둥이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고 아버지를 속인 죄의 대가로 정든 고향땅을 떠나야 했던 거요. 양식 보따리를 챙겨주면서 눈물 지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한데, 어머니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불효자식으로 이제까지 살았단 말이오. 집을 떠났을 때 한 달 가량을 홀로 걸으면서 날마다 울었소. 무서워서 울고, 그리워서 울고, 고독해서 울었소. 내 인생의 미래에 무엇이 있을까? 그때 저는 하나님을 처음 만났고, 부친과 조부의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를 축복해 주어서 삶의 용기를 가졌던 것이오. 장인 어른의 집에서도 서러울 때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오늘은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요. 내가 축복받기 위해 장자의 위치를 빼앗은 죄는 부모와 이별하고, 형과 원수지간이 되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고, 이제 고향 땅에 돌아간들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날 죽이려고 기다리는 쌍둥이 형밖에 없으니, 도대체 내가 무얼 얻기 위해 살았고, 또 앞으로는 어떤 일들이 내 앞에 닥칠지 회의적인 생각만 드는 거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헬은 남편이 왜 그렇게 항상 외로워 보였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야곱에 대해 한없는 연민이 솟았다. 이제 드라빔 사건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것은 뒷전이 되고, 어떻게 하면 남편에게 용기를 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야곱의 고독한 뜰에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장벽이 가로 놓인 듯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울타리는 야훼 하나님만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라헬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마치 상처입은 야생 짐승이 꼼짝 않고 스스로 치료하는 생체 능력에 의존하듯이 그냥 홀로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을 알면서도 몇 마디 격려의 말을 꺼냈다.

"하란으로 가는 길에 만났던 하나님이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당신을 신뢰하고 따르겠어요."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라헬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웠다. 밤이 깊어질수록 야곱의 사색과 고독의 빛깔도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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