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살이 하갈을 찾아왔다. 그는 아브라함의 충직한 심복이었으며 아브라함이 후사가 없었던 때 아브라함 가문의 상속자로 지목받을 정도로 신뢰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직한 성품에 일을 대할 땐 비상한 지혜와 용맹으로 뭇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엘리아살. 그가 움직였다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케하는 일이었습니다.
"하갈, 나와 잠깐 얘기를 나눠야겠소."
하갈은 본능적으로 뭔가 나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 먼 산 너머의 푸른 하늘과 점점이 흩어져 있는 흰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날 처음보는 하늘이었습니다. 하갈은 작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엘리아살이 먼저 말을 건네주기를 기다렸다. 어떤 슬픈 소식이든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태도였다. 하갈의 비장하고 불안한 침묵에 엘리아살도 잠시 침묵으로 응답했습니다.
마침내 엘리아살이 불편한 침묵한 깨뜨렸다.
"하갈, 당신과 저는 다른 측면에서 아브라함 주인님의 총애를 받아왔소…우리는 그분의 충직한 종이라오…."
엘리아살의 말은 하갈의 날카로운 눈빛에 잠시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오늘은 이삭 도련님의 돌 잔치 날이 아니오? 아브라함가에 드물게 큰 잔치였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풀이하는 엘리아살의 태도에 하갈은 갑자기 짜증스러워졌다. 하갈은 엘리아살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요?"
"헌데 좋지 않은 일이 생겼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소."
순간 하갈의 얼굴이 핏기가 사라진 듯 창백해졌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간신히 의식을 가다듬었습니다.
"희롱이라니. 어떻게…어떻게 말인가요?"
"심하게 꼬집은 흔적이 있고, 이삭 도련님의 얼굴에 소변을 본 듯 하오."
하갈은 전율했습니다.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져버린 느낌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사라와 알력이 있어왔기 때문에 오늘 발생한 사건은 그녀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 그녀는 사라를 피하여 도망다니던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의 파편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과 불안감이 소름처럼 돋아났고 동시에 아들 이스마엘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녀석이 결국 만사를 그르치게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가여운 아이였다. 이삭의 출생으로 그애는 아버지의 사람을 잃어 버렸고, 장자의 자리마저 빼앗긴 것입니다. 아예 가져보지 못한 것이면 상실감도 덜 할테지만 가졌다가 잃는 것은 더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한때 정실의 위치를 넘보았던 적이 있는 하갈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가혹한 경험인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불경스런 행동을 누가 이해해 주겠는가? 열세 살의 나이에 누가 일러주지 않았는데도 몸으로 체득한 절망과 좌절이 아이의 내면에 그늘로 숨어있는 것을…. 지난 1년간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은 또 누가 알아줄까? 하갈의 마음은 분노와 연민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냥 고민에 빠져있는 겨를이 없었습니다. 뒷수습을 서둘러 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아살님, 사라 마님이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그렇소. 마님의 노기가 심상치 않소. 조만간 어떤 처벌이 내려질 거요."
"어떤 처벌인가요?"
"아무도 모르오. 마님도 아직 딱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닌 듯해주세요."
"엘리아살님, 제게 지혜를 주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다시 엘리아살이 대답했습니다.
"이스마엘을 사라 마님께 데리고 가서 무조건 빌도록 해주세요. 나도 마님께 선처를 부탁하겠소."
그것은 하갈의 지위를 과거 몸종의 신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3년 동안이나 공들여 쌓아온 그녀의 입지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북받치는 설움에 흐느낌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아! 안돼요…."
엘리아살도 하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딴도리가 없습니다.
"노새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말이 될 수 없는 법이오. 내 말대로 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소."
엘리아살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있길 한참 뒤, 하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엘리아살은 석양을 배경으로 저만큼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해가 언덕 너머로 고개를 떨구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어두운 밤이 하갈의 마음에 차라리 위안을 주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평온은 지극히 일시적이지만 하늘이 베푼 안식의 시간이었습니다. 철없이 자고 있는 이스마엘에게 이불을 끌어 덮어주던 하갈은 기억의 서랍 속에서 13년 전의 일을 꺼냈다.
주인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시간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마치 왕비라도 된 듯 기쁨에 넘치던 나날들, 갓난애였던 이스마엘의 잠든 모습을 들여다보며 이 가문의 후사를 훌륭하게 키우겠노라고 수없이 다짐했던 순간…이제는 서자의 설움을 겪으며 고단한 방황에 지쳐 잠든 아들의 얼굴을 보니 치밀어오르는 슬픔에 하갈의 마음은 미칠것만 같았다. 하갈은 가녀린 손을 꽉 쥐었습니다. 생선가시로 만든 바늘이 부러지고 손가락 사이로 핏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날이 밝았다. 아침 이슬이 사라지기 전에 하갈은 광야로 나갔다. 밤새도록 내리지 못한 결심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습니다. 야산 바위틈 앞에서 두 마리의 독사가 싸우고 있는 장면을 발견하고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한 마리 뱀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달아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갈은 무의식적으로 돌멩이를 주워들어 뒤쫓는 독사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하지만 돌은 빗나가기만 했습니다. 잠시 광야에 나왔던 목적을 잊고 했던 하갈은 자기 앞에 벌어진 장면이 마치 불길한 징조를 보여주는 듯해서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자신의 장막으로 발길을 돌렸다. 온통 이슬과 먼지에 젖은 그녀가 장막 앞에 다다를 즈음 장막 앞에 서 있는 엘리아살과 연로한 여종의 모습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엘리아살은 하갈의 눈빛에서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사라 마님을 찾아가야만 한다고 강권했습니다. 한때 하갈의 보모였던 연로한 여종은 일전에 하갈이 사라에게 쫓겨났었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번에도 사라 마님의 노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피신해 있으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어느새 태양은 껑충 떠올랐고 그날따라 태양의 이동이 빨라진 것 같았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그 궤도를 따라 돌다가 서산으로 기울듯이 모든 인생이 어쩌면 정해진 방향으로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하갈은 자신의 결단이 엘리아살이나 보모의 생각과는 달리하게 될 것 같았다. 무슨 뾰족한 수도 없지만 그들의 생각은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때 마침 이스마엘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장막밖으로 나왔다. 이스마엘의 손에는 아브라함이 만들어준 장난감 목검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수년동안 그 목검을 지니고 다니며 애지중지해왔다. 그 순간 이스마엘을 바라보던 하갈의 눈이 섬광처럼 번득였다.
'사라와의 정면대결입니다.'
하갈은 최악수를 선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의 목검을 엘리아살에게 건네주면서 아브라함에게 메시지와 함께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칼에는 '아브라함의 장자'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친히 만들고 새겨 넣은 칼과 문양을 상기한다면 충분히 옛언약을 기억해 낼 것입니다. 하갈은 자신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호해 달라는 절박함을 아브라함이 읽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눈치 빠른 엘리아살이 그 의미를 모를리 없었습니다.
"하갈, 그래선 안돼요. 주인님을 끌어 들이면 문제만 커질 뿐… 또 주인님의 입장만 난처해질 것이오."
곁에 서 있던 노종이 엘리아살의 말을 거들었습니다.
"만일 이 사실이 사라 마님께 알려지면 더 이상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돼. 하갈! 제발 정신 좀 차려."
"그 수밖에 없어요."
하갈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엘리아살은 하갈의 고집을 꺾을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지만 이대로 놔두면 큰일이 벌어질 것은 자명한 사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라와 하갈의 정면 대결 만큼은 피하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갈, 내 생각에는 우선 사라 마님이 부르시기 전에 먼저 찾아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