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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서로 알게 된 인연 때문에 그 뒤에도 몇년에 걸쳐 친하게 지낸다는 일은 요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 집에서는 '캄프리 박사'로 통하는 석명석씨와 필자와의 교우관계는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2년도 36빌딩에서 출판사의 간판을 내리고 (성광자기 체질개선연구원)의 간판을 단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련이었습니다.

'주간여성'에 실린 '괴짜 인생'이라는 기사를 보았노라고 하면서 두 중년신사가 필자의 연구원을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서로 인사가 끝나자 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과 신부님이 함께 다니시는군요. "

그러자 두 손님 가운데 좀더 연배로 보이는 분이 대뜸 반색을 하면서,"누가 스님이고, 누가 신부라는 겁니까?"

하고 반문을 해 왔다.

"선생은 그 옛날 중국의 소림사 주지스님으로서 소림권법을 창시한 분이니 지금은 비록 스님이 아니지만 스님이라고 부른 것이고, 또 한분은 3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신자의 집안 출신이고, 그 앞서 세상에서는 신부로서 순교하신 분 같아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

그러자 필자에게 반문한 손님은 무릎을 치면서 감탄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독실한 불교신자이고, 내 매제는 3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신자인게 분명합니다. 물론, 전생이 누구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처해진 처지는 아주 분명하게 맞히셨습니다."

그러자, 그때 필자의 연구윈에서 같이 일하던 미스터 왕이 필자를 한 구석으로 불렀다.

"원장닝이 지금 아주 큰 실언을 하신 것 같습니다. 소림사 권법을 창시한 분은 달마대사인데 그분은 굉장한 분이 아니십니까? 저분이 달마대사의 제자가 재생했다면 또 몰라도 달마대사의 재생이란 말이 안됩니다. 만일 불교계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원장님의 입장이 난처해지실 겁니다." 하고 자기 딴에는 나를 위해 충고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이때 내린 영사에 대해서 스스로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석명석씨가 저 유명한 달마대사의 재생이 아니라는 뚜렷한 증명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가 달마대사이리라는 증거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경전을 보면 달마대사는 왕자로서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후세 사람들이 뛰어난 스님을 신격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전기가 아니라는 보증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 것입니다.

석명석씨와 인사를 나눈지 며칠이 지난 뒤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필자는 모처럼의 휴일을 집에서 쉬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별로 바쁜 일이 없으면 인천에 있는 자기 집에 함께 가주지 않겠느냐는 부탁이었습니다.

그 순간 필자는 별난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불과 며칠 전에 한번 인사를 나눈 사이인데, 모처럼 일요일에 쉬고 있는 사람을 꼭 인천까지 동행하자니 과연 이상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한편 나가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거절을 하려는데 갑자기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사람이 하나 죽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엉뚱하기 그지없는 불길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든 이상 그냥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일에 필자가 석명석씨의 청을 거절했다가 어떤 참변이 일어난다면 그 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필자는 내키지 않는 마음을 채찍질하여 석명석씨가 다니는 은행 근처 다방에서 만났다. 그날따라 흐린 날이어서 첫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다방에서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보기와는 달리 석명석씨의 가정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았다.

부인하고는 오랜 세월에 걸친 불화 때문에 거의 남이나 다름없었고 사랑하던 둘째 아들이 익사한 일이 있는데다가 큰아들이 항상 말썽을 일으키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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