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저런 구름이 생기면 비가 내려.”
“그렇지 않아.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을 봐. 저 정도 속도로 움직이면 구름이 비를 만들 때쯤에는 다른 동네로 이동해서 이 동네에는 비를 내릴 수 없어.” “아니야.
지금은 바람이 동쪽으로 불지만 서쪽 끝에 구름이 흩어지는 것 봐. 곧 바람의 방향이 바뀔거야.” 연년생인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둘이서 많은 토론을 벌였다. 저는 방송국에 다녀서 평소에 아이들과 같이 놀아줄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자, 지금부터 대화를 나누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대화는 주로 저녁식사 후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와 대화를 나누려면 학교숙제를 미리 해두어야 했습니다. 만약 엄마와 나누는 이야기가 재미없다면 미리 숙제하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미리 숙제를 해놓고 엄마와의 대화시간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 흥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개발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들과 서로의 일과에 대한 이야기만 주고 받으면 대화가 단조롭고 재미가 없어 아이들은 절대 미리 숙제를 마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TV를 보거나 같은 책을 읽은 후 그 내용속에서 주제를 정해 토론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간 후부터 저는 회사에서도 틈만 나면 동화나 어린이책을 보느라고 정작 나에게 필요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토론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엄마라고 해서 봐준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다른 책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발전되어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의 수업을 토론식으로 진행하는 미국 학교로 유학을 가서도 그곳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위해 내 인생 전체를 거는 극성 어머니는 아니다. 미국에 간 것도 아이들의 유학을 위해서가 아니가 내가 유학을 가는데 아이들이 따라간 것입니다. 다만 저는 내가 낳은 자녀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성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최대한의 뒷받침은 해주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재산을 남겨주거나 비싼 과외를 시켜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야심가로 기를 생각은 없으며 즐겁게 일하고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출세한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넓은 세상을 보는 안목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길러주는 일에 차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성공이나 실패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능한 한 여행을 많이 다니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5학년과 4학년때 우리 가족은 배낭을 메고 2주간 유럽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일반인의 해외여행이 막 허용되기 시작해 여행지에서 아주 많은 우리나라 대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유럽으로 출발하기 전에 유럽 역사책을 외우다시피 많이 읽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대학생 형들과 토론을 벌이곤 했습니다. 평소 엄마와 토론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어떤 형들과도 토론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이 즐거워졌다. 그때 유럽 여행을 하면서 스위스 루체른에 갔을 때 우리는 호숫가에 있는 캠프장에 묵었습니다. 저는 아이들만 캠프장에 두고 남편과 알프스의 한 봉우리인 필라투스에 다녀왔다. 아이들은 캠프장 근처에 있는 자동차 박물관에 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캠프장에 두고 어른들만 산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낯선 캠프장에 남겨두고 부부끼리만 등산을 떠나는 일을 놀라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캠프장에 남아 있던 우리 아이들은 둘이서 근처에 있는 자동차 박물관에 다녀온 후 토론을 벌이며 잘 지냈다고 합니다.